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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령 ~~

바람아 ~~ 2012. 2. 13. 10:17

 

 

 

2012-02-12 일요일

 

 

 

 

대동여지도와 백두대간 충북의 옛고개 - 고치령(단양군 영춘면-경북 영주시 단산면) 

단종과 금성대군의 한이 서린 곳
소백·태백산 중간위치 이른바 '兩白지간'
순흥-영춘-영월 이어주는 보부상 '商路'
동학 2세교주 최시형의 도피루트 이기도
충북 사면에 옛길 남아 있으나 관리 안돼

   

등록일: 2011-08-24 오후 3:52:14

 

남쪽 국망봉(1,421m)과 북쪽 형제봉(1,177m)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고도는 760m다. 청원-보은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피반령이 360m인 점을 감안하면, 그 높이를 가늠할 수 있다.

행정적으로는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와 경북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를 정남-정북으로 연결하고 있다.(대동여지도 참조) 

고치령은 여타 백두대간 고개와 행정적으로 약간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대개의 경우 백두대간 고갯길 정상을 사이에 두고 충북과 경북의 도계(道界)가 형성돼 있다. 그러나 이곳 만큼은 경북도계가 고개 정상을 넘어 백두대간 북쪽 사면까지 들어와 있다.

 
- 고치령 정상의 조형물이다. '옛고개가 고치령이 됐다'고 적어 놓고 있으나 사실 규명이 필요해 보인다.
따라서 고치령(古峙嶺) 정상과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 사이에는 영주시 단산면 마락리가 위치하고 있다. 때문에 경북의 도계 조형물(사진 참조)도 백두대간 북쪽 사면에 세워져 있다. 충북으로서는 썩 기분좋은 모습은 아니다.

고치령 영로는 남북사면 모두 S자형 굴곡을 많이 지니고 있다. 경사도는 경북 사면이 다소 가파른 모습이어서, 승용차 브레이크를 자주 밟게 된다. 반면 충북 사면은 5월에도 잔설이 남아 있을 정도로 응달이 짙게 지고 있다.

대간(大幹)인 만큼 마루금(능선)은 분수령 역할을 정확히 하고 있다. 충북 사면의 빗물은 마포천, 옥동천을 거쳐 영월을 지나온 남한강에 합류한다. 반면 경북 사면의 빗물은 일단 단산저수지에 모였다가 다시 죽계천, 내성천을 거쳐 낙동강에 유입된다.

◇지리지 속의 죽령

 
- 대동여지도로, 중간 하단에 '串赤嶺'이 보인다. 순흥-영춘-영월이 거의 직선으로 연결돼 있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 1866)는 대동여지도에서 경상도 순흥-충청도 영춘-강원도 영월을 거의 직선으로 연결했다. 그리고 그 직선이 백두대간과 만나는 지점에 '곶적령'(串赤嶺)을 적어놨다.

곶적령을 '관적령'으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으나, 지금의 지명이 '고치령'인 점을 고려하면 곶적령이 맞아 보인다.

곶적령 이름은 문헌상 세종실록지리지(1425, 단종),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중종) 등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1752, 영조) 산천조에 처음 등장한다.

'곶적령: 부(순흥 지칭)의 삼십리에 있다. 마아령에서 왔고 길은 영월, 영춘으로 통한다.'(串赤嶺: 在府北三十里 自馬兒嶺來 路通寧越永春)-<여지도서>

 
- 고치령 고갯길은 좁은 편이다. 승용차도 교행이 안되는 곳이 매우 많다.
대동지지((1861, 철종)는 '남쪽 삼십리에 있다. 순흥과 영천으로 통한다. 매우 험난하다'라고 적었다.

따라서 곶적령은 장시가 활성화된 조선후기부터 사람과 물산의 왕래가 활발히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영춘의 장날은 4.9일, 순흥은 6.10일로 각각 달랐다. 장날이 달랐다는 것은 당시 보부상들이 시간차를 이용, 양쪽을 활발히 오갔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와 관련, 대동지지는 당시 영춘현이 특산품으로 잣, 대추, 꿀, 회양목, 송이, 누치, 쏘가리 등을 적었다. 반면 순흥 특산물로는 닥, 감, 석이버서, 은어 등을 기록했다. 

당시 보부상들은 직선거리 14㎞의 양쪽을 오가며 이같은 특산품을 거래, 마진을 남겼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추를 주목할 픽요가 있다. '삼복에 비가 많이 오면 보은처녀 운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대추는 보은이 유명하다. 그러나 적어도 문헌상의 조선시대 대추는 연산군이 진상을 명령할 정도로 영춘 것이 더 유명했다.

'전교하기를, "영춘현(永春縣)에서 생산되는 대추를 해마다 헌납하라" 하였다.(傳曰: "永春縣産大棗其歲獻")-<연산군일기>

고치령의 북쪽 들머리인 영춘면 의풍은 예로부터 양백지간(兩白之間), 삼풍지간(三豊之間)의 고을로 불렸다. 전자는 소백산과 태백산의 중간, 후자는 물·산·땅이 좋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역사속의 사건

단종복위 운동이 일어났다. 1차는 이른바 사육신이, 2차는 금성대군이 주도했다. 세종의 6남인 금성대군(본명 이유)은 계유정난이 발생하자 형(수양대군)의 행위를 반대하고 조카(단종)를 보호하기로 결심했다.

 
- 고치령 정상의 이정표이다. 해발고도를 760m로 적어놨으나 일부에서는 780m로 보기도 한다.
이를 눈치챈 세조는 금성대군을 '당여를 키운다'는 죄명으로, 고치령 남쪽 사면인 순흥으로 유배를 보냈다. '당여'(黨與)는 자기편 사람을 모으는 행동을 말한다. 금성대군은 이곳에서 단종복위 행동을 구체화했다.

'장차 순흥의 군사와 남쪽의 모의에 참여한 자를 발하여 노산을 맞아서 계립령(鷄立嶺)을 넘어 순흥에 옮겨 모시고 영남을 호령하여 조령(鳥嶺)과 죽령(竹嶺)의 두 길을 막고서 복위할 계책을 세웠다.'-<연려실기술>

인용문에는 '노산(단종 지칭)을 계립령을 넘어 순흥으로 모신다'로 돼 있다. 그러나 이는 거리, 지형, 작전 등 어느 것도 맞지 않는다. 계립령은 고치령의 오기(誤記)임이 분명해 보인다. 서두에 영월-영춘-순흥이 직선으로 연결돼 있음을 강조한 것은 이 때문이다.

당시 옆에서 이를 도운 인물이 순흥부사 이보흠이다. 그도 세조를 못 마땅히 여기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계획은 중간에 비밀이 새나가면서 불발로 끝났다. 

그 결과, 단종은 영월에서, 금성대군은 안동에서, 이보음은 평안도 박천에서 교살내지 사사됐다. 이른바 정축지변으로, 그 공간적인 주무대는 고치령 일대였다. 

일부에서는 이보흠이 고치령을 넘어 단종이 있는 영월 청령포와 순흥을 오갔다고 적고 있으나 문헌상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훗날 정조는 억울하게 희생된 금성대군을 위해 제문을 지었다. 제목은 '금성대군 이유(李瑜) 치제문'이다. 

'노릉지를 읽을 때에 /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니 / 사육신과 생육신은 / 신하가 되어 신하의 본분을 다했네 / 종실의 공자(公子)로서 떨친 이는 / 금성대군이 열렬하였으니 / 노 나라 위 나라처럼 형제의 관계이고 / 백이숙제의 절의가 있었네 / 변방에 버려져 귀양을 떠나니 / 대령의 남쪽이었네 /…/'-<홍재전서>

인용문 중 '노릉지'는 노산대군 묘지에 관한 글, '대령 남쪽'은 고치령 바로 아래인 순흥지역을 의미하고 있다.

 
- 고치령 정상에 서있는 산신각이다. 단종과 금성대군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현재 고치령 정상에는 백두대간 충북고개 중 유일하게 산신각(사진 참조)가 세워져 있고, 그 안에 단종과 금성대군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곳을 찾는 산사람들은 단종은 태백산 신령, 금성대군은 소백산 신령이 됐다고 믿고 있다. 

방향은 다르지만 금성대군 사우인 청당사(靑塘祠)가 우리고장 진천군 초평면 용기리 416에 위치하고 있다. 금성대군의 부인은 최사강의 딸인 전주최씨로, 초평서 가까운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가 친정이었다는 설이 있다.

고치령 충북사면은 동학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곳이기도 했다.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은 부인 손씨가 단양옥에 갇히자 도주를 하게 된다. 그 도주로가 고치령 아래인 남천, 동대, 의풍 지역이었다.

◇주변의 명소와 콘텐츠 개발

 
- 고치령 부근의 충북과 경북의 도계이다. 경북 조형물 천마도에서는 힘이 느껴지지만, 충북쪽에는 어떤 조형물도 설치돼 있지 않다.

고치령 남북 사면은 워낙 오지이기 때문에 현존하는 문화재가 거의 없다. 대신 비포장도로 구간이 남아 있어, 옛길 복원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고치령 경북사면은 모두 포장돼 있다. 

반면 충북사면 상당 구간은 비포장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정비가 전혀 안 돼 있기 때문에 옛길 분위기가 거의 나지 않는다. 

적절한 복원 계획을 세워 옛길을 복원할 경우 훌륭한 걷기문화 공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지금도 고치령 충북 구간에는 이정표가 하나도 존재하지 않고 있다. 이정표는 옛길 복원에 앞서 빨리 설치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도계 조형물 설치도 필요하다. 경북은 요란하다 할 정도로 도계 표지석과 함께 천마도 그림을 설치해 놓았다.(그림 참조) 충북도계에는 어떤 조형물도 존재하지 않고 있다.

/ 조혁연 대기자 / 충북일보

 

 

 

이보흠(李甫欽) : 1397년(태조6,丁丑)~1457년(세조3,丁丑),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경부(敬夫), 호는 대전(大田), 정조때 시호는 충장(忠莊), 휘 석지(釋之) 할아버지의 다섯째 아들인 부사직(副司直) 휘 현실(玄實) 할아버지의 아들이시며, 어려서 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학문을 좋아 하셨는데,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의 문하생으로서,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과 강공 효문(康公孝文)등과 공부하셨다.

1415년(태종15,乙未) 18세때 永川 西山 松谷아래 유방선(柳方善)이 지은?���태재(泰齋)?���에서 수학 하시고,

1429년(세종11,己酉) 32세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 5등으로 급제, 이듬해 동부훈도관으로 공법(貢法)논의에 참여하여 전제(田制)와 세법을 논의 하셨다.

1434년(세종16,甲寅) 37세때 사정(司正)으로 우효강(禹孝剛)․김순(金淳) 등의 문사와 함께《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찬수에 참여하셨다.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로 선발되어 성삼문(聖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후일에 사육신이 된 제현들과 함께 박사(博士)가 되어 역대통감(歷代通鑑)을 편수(編修)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으셨고,

1443년(세종25,癸亥) 48세에 감찰로서 사은사(謝恩使) 서장관(書狀官:기록관)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 오시는 등 국제 외교에도 공을 세워셨고, 다녀 오신후 성균관 주부(主簿)가 되셨다. 이어 축성법에 대한 건의 또는 공법논의 등에 참여하셨고, 외직을 맡을 때의 경험 등을 토대로,

1445년(세종27,乙丑) 50세때 사창법(社倉法)에 관한 건의를 하여, 사창제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세자(뒤의 문종)의 총애를 받으셨다.

1448년(세종30,丁卯) 53세에 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로 외직을 맡고 있던 중, 사창제도를 시행하려는 세자의 뜻에 따라, 지대구군사(知大邱郡事)로 옮겨져 대구(大邱)에서 최초로 사창법(社倉法)을 시험적으로 실시하셨다. 대구지방의 효과적인 사창법의 시행으로?���순량(循良)?���의 칭송을 얻었으며, 문종은 즉위 후 총애하던 할아버지를 임기를 채우지 않고 경직(京職)에 초탁(超擢)하려 하였으나, 사창제의 계속적 실시를 위하여 임기를 마치셨다. 그 공으로

1452년(문종2,壬申) 57세때 사헌부 장령에 초배(超拜)되셨고,

1454년(단종2,甲戌) 59세에 직예문관으로《세종실록》편수의 기주관이 되셨다. 할아버지는 중앙정부에 계실때나 특히, 지방장관으로 재직시에 공무처리를 공정하고 신속하게 잘 하셨고, 생활이 검소하시고 백성을 사랑하셨으므로 주위의 존경을 받으셨다. 문종때 사헌부 장령(掌令:종4품)으로 계실때 수양대군에 의한 단종의 선위사태가 발생하자 벼슬을 버리시고 대전마을로 돌아 오셨다가, 다시 소명되시어

1457년(세조3,丁丑) 62세때 순흥부사(順興府使:정3품)로 있을 때, 세조에 의해 순흥에 유배되어 있는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와 서로 의기를 투합하여 재향품관(在鄕品官)․군사(軍士)․향리(鄕吏) 등 이른바 영남사인들을 규합하여, 폐위된 단종(端宗)의 복위를 위한 격문을 지어, 은밀히 사방으로 보내, 의사․협격들을 순흥고을로 모여 들게 하여, 군비를 모으고, 무기를 장만하고, 군사를 조련하는 등, 영월에 유배되어 있던 단종임금 복위를 꾀하는 거사가 무르익어 가던 가을 어느날, 밀의를 엿들은 순흥부의 한 관노의 밀고에 의하여 관군의 습격을 받은 순흥고을은 온통 불더미에 피바다를 이루는 도륙을 당하면서 폐부되고 말았다.

이로서 복위를 도모하셨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순절하신 사육신(死六臣)에 한분을 더하여 사칠신(死七臣)이라 일컬어지시며, 박천(博川)에 유배되신 뒤, 금부도사 최수남(崔秀男)에게 교살(絞殺) 되셨다.

1738년(英宗戊午)에 관직이 복원되시고

1739년(英宗己未)에 충장(忠莊)이란 호를 하사 받으셨다.

할아버지가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인 권근(權近)과 변계량(卞季良)의 제자인 유방선(柳方善)에게서 출신지인 영천에서 수학하셨다는 점과, 길재(吉再)의 묘에 문제(文祭: 以文祭之함)를 지냈다는 점, 그리고 대구의 수령을 맡을 때 공렴품관(公廉品官) 등 영남지방의 재향사류(在鄕士類)와 연결하여 성리학적 향촌질서의 이론으로 주자(朱子)가 고안한 사창법을 최초로 실시하였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영남 성리학 학통의 계승과정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단종 복위사건으로 순흥도호부가 폐부된 이례 숙종(肅宗) 8년까지 227년간 순흥지방은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정조때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셨고, 광주(光州)의 대치사(大峙祠)와 영천(永川)의 송곡서원(松谷書院), 청안(淸安)의 향사(鄕祠)에 제향(祭享) 되셨다.

【참고문헌】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4, 순난제신(殉難諸臣), 世宗實錄, 文宗實錄, 世祖實錄, 正祖實錄, 國朝人物志, 사림파(士林派)의 유향소복위운동(留鄕所復位運動)

 

1.세조실록 9권, 3년(1457 정축 / 명 천순(天順) 1년) 10월 27일(정사) 3번째기사


     의금부 도사 최계남을 박천에 보내 이보흠을 교살하다.

 

 의금부 도사 최계남(崔季男)박천(博川)으로 보내어, 이보흠(李甫欽)을 교살(絞殺)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책 9권 29장 B면

【영인본】 7책 232면

 

 

2.연려실기술: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

정난(靖難)에 죽은 여러 신하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

금성대군 유는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데, 을해에 삭녕(朔寧)으로 귀양갔다가 병자에 순흥(順興)에 안치되었고, 정축에 화를 입었다. 뒤에 신원하였고, 시호는 정민공(貞愍公)이다.
○ 을해년(1455)에 대신들이 말하기를, “공이 난을 음모하여 한남군(漢南君) 어( )ㆍ영풍군(永豊君) 선(瑔)ㆍ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과 더불어 서로 공모하였으니, 급히 그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삭녕으로 귀양보냈다. 병자에 성삼문 등이 죽으매, 공을 순흥에 안치하고 그 가산을 몰수하였다.정축년(1457)에 순흥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더불어 상왕의 복위를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안동(安東) 옥에 갇히었다. 하루는 알몸으로 도망하였는데, 부중(府中)을 크게 수색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한참만에 밖에서 들어오면서, 웃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비록 무리는 많으나, 하잘 것 없구나. 내가 어찌 진실로 도망할 사람이냐. 우리 임금이 영월에 계시다.” 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북향하여 사배(四拜)하고 죽음을 받았다. 여러 사람들이 불쌍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장릉지》


이보흠(李甫欽)

이보흠은, 자는 경부(敬夫)이며, 호는 대전(大田)이요,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세종 기유에 문과에 올라 집현전 박사를 지냈다. 정축에 순흥 부사(順興府使)가 되어 금성대군과 더불어 함께 상왕의 복위를 꾀하다가 베임을 당하였다. 시호는 충장공(忠莊公)이다.
○ 공은 문장에 능하고 사무 처리에 재주가 있었으며, 성품이 검소하여 옷이 때묻고 떨어져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해동잡록》
○ 단종이 왕위를 내놓은 뒤에 공은 벼슬하기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일찍이, 글을 지어서 길주서(吉注書)의 묘에 제사하였는데, 그 글에 말하기를, “주무왕이 의거를 하매, 백이ㆍ숙제가 고사리를 수양산에서 캤고, 한 광무가 중흥하니, 엄자릉(嚴子陵)이 낚시를 부춘(富春)에 드리웠다.” 하였다. 《병자록》
○ 정축에 순흥 부사가 되었다. 금성대군 유가 순흥으로 귀양와서 매양 공과 더불어 서로 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가만히 영남 인사들과 연결하여 상왕을 복위시키려다가 일이 발각되니 곤장을 때리고, 박천(博川)으로 귀양 보냈다가 얼마 뒤에 금부 도사를 보내어 베었다.

 

 외 성삼문,박팽년,이개 등 다수(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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