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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치령 고갯길은 좁은 편이다. 승용차도 교행이 안되는 곳이 매우 많다. | |
| 대동지지((1861, 철종)는 '남쪽 삼십리에 있다. 순흥과 영천으로 통한다. 매우 험난하다'라고 적었다.
따라서 곶적령은 장시가 활성화된 조선후기부터 사람과 물산의 왕래가 활발히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영춘의 장날은 4.9일, 순흥은 6.10일로 각각 달랐다. 장날이 달랐다는 것은 당시 보부상들이 시간차를 이용, 양쪽을 활발히 오갔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와 관련, 대동지지는 당시 영춘현이 특산품으로 잣, 대추, 꿀, 회양목, 송이, 누치, 쏘가리 등을 적었다. 반면 순흥 특산물로는 닥, 감, 석이버서, 은어 등을 기록했다.
당시 보부상들은 직선거리 14㎞의 양쪽을 오가며 이같은 특산품을 거래, 마진을 남겼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추를 주목할 픽요가 있다. '삼복에 비가 많이 오면 보은처녀 운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대추는 보은이 유명하다. 그러나 적어도 문헌상의 조선시대 대추는 연산군이 진상을 명령할 정도로 영춘 것이 더 유명했다.
'전교하기를, "영춘현(永春縣)에서 생산되는 대추를 해마다 헌납하라" 하였다.(傳曰: "永春縣産大棗其歲獻")-<연산군일기>
고치령의 북쪽 들머리인 영춘면 의풍은 예로부터 양백지간(兩白之間), 삼풍지간(三豊之間)의 고을로 불렸다. 전자는 소백산과 태백산의 중간, 후자는 물·산·땅이 좋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역사속의 사건
단종복위 운동이 일어났다. 1차는 이른바 사육신이, 2차는 금성대군이 주도했다. 세종의 6남인 금성대군(본명 이유)은 계유정난이 발생하자 형(수양대군)의 행위를 반대하고 조카(단종)를 보호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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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치령 부근의 충북과 경북의 도계이다. 경북 조형물 천마도에서는 힘이 느껴지지만, 충북쪽에는 어떤 조형물도 설치돼 있지 않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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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령 남북 사면은 워낙 오지이기 때문에 현존하는 문화재가 거의 없다. 대신 비포장도로 구간이 남아 있어, 옛길 복원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고치령 경북사면은 모두 포장돼 있다.
반면 충북사면 상당 구간은 비포장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정비가 전혀 안 돼 있기 때문에 옛길 분위기가 거의 나지 않는다.
적절한 복원 계획을 세워 옛길을 복원할 경우 훌륭한 걷기문화 공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지금도 고치령 충북 구간에는 이정표가 하나도 존재하지 않고 있다. 이정표는 옛길 복원에 앞서 빨리 설치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도계 조형물 설치도 필요하다. 경북은 요란하다 할 정도로 도계 표지석과 함께 천마도 그림을 설치해 놓았다.(그림 참조) 충북도계에는 어떤 조형물도 존재하지 않고 있다.
/ 조혁연 대기자 / 충북일보
이보흠(李甫欽) : 1397년(태조6,丁丑)~1457년(세조3,丁丑),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경부(敬夫), 호는 대전(大田), 정조때 시호는 충장(忠莊), 휘 석지(釋之) 할아버지의 다섯째 아들인 부사직(副司直) 휘 현실(玄實) 할아버지의 아들이시며, 어려서 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학문을 좋아 하셨는데,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의 문하생으로서,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과 강공 효문(康公孝文)등과 공부하셨다.
1415년(태종15,乙未) 18세때 永川 西山 松谷아래 유방선(柳方善)이 지은?���태재(泰齋)?���에서 수학 하시고,
1429년(세종11,己酉) 32세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 5등으로 급제, 이듬해 동부훈도관으로 공법(貢法)논의에 참여하여 전제(田制)와 세법을 논의 하셨다.
1434년(세종16,甲寅) 37세때 사정(司正)으로 우효강(禹孝剛)․김순(金淳) 등의 문사와 함께《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찬수에 참여하셨다.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로 선발되어 성삼문(聖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후일에 사육신이 된 제현들과 함께 박사(博士)가 되어 역대통감(歷代通鑑)을 편수(編修)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으셨고,
1443년(세종25,癸亥) 48세에 감찰로서 사은사(謝恩使) 서장관(書狀官:기록관)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 오시는 등 국제 외교에도 공을 세워셨고, 다녀 오신후 성균관 주부(主簿)가 되셨다. 이어 축성법에 대한 건의 또는 공법논의 등에 참여하셨고, 외직을 맡을 때의 경험 등을 토대로,
1445년(세종27,乙丑) 50세때 사창법(社倉法)에 관한 건의를 하여, 사창제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세자(뒤의 문종)의 총애를 받으셨다.
1448년(세종30,丁卯) 53세에 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로 외직을 맡고 있던 중, 사창제도를 시행하려는 세자의 뜻에 따라, 지대구군사(知大邱郡事)로 옮겨져 대구(大邱)에서 최초로 사창법(社倉法)을 시험적으로 실시하셨다. 대구지방의 효과적인 사창법의 시행으로?���순량(循良)?���의 칭송을 얻었으며, 문종은 즉위 후 총애하던 할아버지를 임기를 채우지 않고 경직(京職)에 초탁(超擢)하려 하였으나, 사창제의 계속적 실시를 위하여 임기를 마치셨다. 그 공으로
1452년(문종2,壬申) 57세때 사헌부 장령에 초배(超拜)되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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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조실록 9권, 3년(1457 정축 / 명 천순(天順) 1년) 10월 27일(정사) 3번째기사
의금부 도사 최계남을 박천에 보내 이보흠을 교살하다.
의금부 도사 최계남(崔季男)을 박천(博川)으로 보내어, 이보흠(李甫欽)을 교살(絞殺)하였다. |
2.연려실기술: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
정난(靖難)에 죽은 여러 신하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
금성대군 유는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데, 을해에 삭녕(朔寧)으로 귀양갔다가 병자에 순흥(順興)에 안치되었고, 정축에 화를 입었다. 뒤에 신원하였고, 시호는 정민공(貞愍公)이다. ○ 을해년(1455)에 대신들이 말하기를, “공이 난을 음모하여 한남군(漢南君) 어( )ㆍ영풍군(永豊君) 선(瑔)ㆍ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과 더불어 서로 공모하였으니, 급히 그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삭녕으로 귀양보냈다. 병자에 성삼문 등이 죽으매, 공을 순흥에 안치하고 그 가산을 몰수하였다.정축년(1457)에 순흥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더불어 상왕의 복위를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안동(安東) 옥에 갇히었다. 하루는 알몸으로 도망하였는데, 부중(府中)을 크게 수색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한참만에 밖에서 들어오면서, 웃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비록 무리는 많으나, 하잘 것 없구나. 내가 어찌 진실로 도망할 사람이냐. 우리 임금이 영월에 계시다.” 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북향하여 사배(四拜)하고 죽음을 받았다. 여러 사람들이 불쌍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장릉지》
이보흠(李甫欽)
이보흠은, 자는 경부(敬夫)이며, 호는 대전(大田)이요,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세종 기유에 문과에 올라 집현전 박사를 지냈다. 정축에 순흥 부사(順興府使)가 되어 금성대군과 더불어 함께 상왕의 복위를 꾀하다가 베임을 당하였다. 시호는 충장공(忠莊公)이다. ○ 공은 문장에 능하고 사무 처리에 재주가 있었으며, 성품이 검소하여 옷이 때묻고 떨어져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해동잡록》 ○ 단종이 왕위를 내놓은 뒤에 공은 벼슬하기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일찍이, 글을 지어서 길주서(吉注書)의 묘에 제사하였는데, 그 글에 말하기를, “주무왕이 의거를 하매, 백이ㆍ숙제가 고사리를 수양산에서 캤고, 한 광무가 중흥하니, 엄자릉(嚴子陵)이 낚시를 부춘(富春)에 드리웠다.” 하였다. 《병자록》 ○ 정축에 순흥 부사가 되었다. 금성대군 유가 순흥으로 귀양와서 매양 공과 더불어 서로 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가만히 영남 인사들과 연결하여 상왕을 복위시키려다가 일이 발각되니 곤장을 때리고, 박천(博川)으로 귀양 보냈다가 얼마 뒤에 금부 도사를 보내어 베었다.
외 성삼문,박팽년,이개 등 다수(생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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